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도전(드라마)/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문단 편집) === 제5회 === * 정도전이 원나라 사신 맞이를 거부하였다는건 역사적 사실이다. 정도전 등 신진사류들이 공민왕을 지하에서 어떻게 보려고 그러냐며 사신맞이의 불가를 아뢰었으나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정도전이 경복흥의 집에 가서 "내가 마땅히 사신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올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명나라에 묶어 보내겠다."라고 한 다음 명덕태후에게 "사신 맞이는 불가하다"라고 고하자 경복흥과 이인임이 분노하여 그를 회진으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극에서 경복흥의 집이 아닌 도당에서 칼부림(?)을 했다거나 이인임의 멱살을 잡았다는 건 픽션이다. 정도전은 이후 2년간 유배살이를 한다. 다만 이 일은 안사기가 돌아온 김의의 수행원을 대접했다는 죄목으로 박상충에게 탄핵당해 자결한 이후의 일인데 본작에선 이 사건이 그 앞으로 앞당겨졌다. 애시당초 나하추는 우왕 1년 정월과 5월에 각각 사신을 보냈는데 본작에선 시간 문제상 그 둘이 합쳐진듯. 전체적으로 우왕 1년에 있었던 사건들이 시간 구분없이 뒤섞인 느낌이 강하다. * 신진사대부들이 북원과의 화친을 반대한건 사실이고 정몽주와 정도전이 그 중심에 있었던것도 맞지만 정도전의 성균관 농성이나 최영의 성균관 난입 후 진압은 픽션. 그래도 나중에 박상충 고문때도 나오겠지만 최영이 신진사류 쪽에 호의적이진 않았다는 건 맞다. 유배지역이 전라도 나주의 부곡이었던것은 실제 사실이 맞다. 이인임이 정도전이 태후에게 사신 맞이 불가를 아뢰자 공무를 보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 * 정도전이 부곡으로 귀양을 가면서 하급 관리들이 부곡 백성들에 대해 "양인이지만 천민만도 못하다"고 폄하하는 발언을 하는데, 고려 말기에는 향, 소, 부곡 등의 특수 행정구역에 대한 차별이 사라진 상태였다. 애초에 이런 특수 행정 구역들은 고려 중기 군현제도의 정비와 민란, 지속적인 토지 개간으로 인한 경제력 확대, 여러 차례의 전란에서 공을 세운 지역을 승격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몇몇 지배층의 사적 경제기반으로 변질되기 시작했고, 고려 말기로 가면 하층민들의 출세와 거주지 이전, 행정구역 변경 등이 여러 차례 겹쳐 이미 명목상으로만 남아있는 수준이 되며, 이련 명목상의 특수 행정구역은 조선 초중기까지 남아있지만 실질적 영향력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